“공부는 뒷전…일배우는 재미 빠져”

시골촌놈, 서울에 발붙이다

필자의 생애 첫 부임지인 대구서부세무서에서 약 1년10개월간에 걸쳐 철부지 세금쟁이로 일하다가 68년5월1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서울로 상경하여 두번째 부임지인 동대문구 보문동 대광고등학교 옆에 있는 동대문세무서에 첫 출근을 했다.

이곳에서 필자가 배치받은 곳은 조사과 자료계였다. 자료계 업무는 이미 대구에서 담당해 왔던 업무였으니 다소 익숙해 있었다. 여기에다 업무 특성상 단순한 면도 있었으니….
참고로 국세청 개청 당시에 처음으로 발족된 조사과는 조사계와 사찰계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아마도 이름 자체에 너무 강압적인 분위기가 담겨서인지는 몰라도 조사계 대신 자료계로, 사찰계 대신 공정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편 필자 개인의 경우에는 2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세상 물정에는 어둡고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첫 부임지 상황에 비하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낮에는 과세자료전 작성업무와 가끔씩 업체 현장에 나가서 과세자료 명세서가 제대로 작성‧제출됐는지를 확인하는 업무에도 다소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정도 담당업무에 자신감이 생겼다.

필자의 또다른 신분인 대학생으로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막상 직장 동료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한번, 두번 학교수업에도 빠지게 되고 술자리에는 자주 가게 됐다. 술자리라고 해야 지금의 양주집이나 룸사롱 같은 곳이 아닌 허름한 막걸리집 아니면 소주집 정도였으니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 간섭하는 가족들도 없었으니…
특히 동대문세무서가 위치한 신설동 로타리 일대는 인근에 있는 고려대의 영향인지 몰라도 대부분 막걸리집들이 많았다.
또 무엇보다 학교 수업에 출석해 가보면 또래 대학생들이 왠지 모르게 생각하는 것들이 필자보다 한수 아래로 보여지기도 하여 자연히 학업에 열중하기보다는 직장일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딸린 식구가 없는 20대 초년의 청년에다 무엇보다 상사인 조사과장이나 계장으로부터 업무능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되고 보니 조사과 안에서 웬만한 업무는 필자에게 안겨지게 됐다.
심지어 옆에 있는 공정계에서 관내 업체로부터 영치해 온 서류 검토업무에까지 필자를 차출시켜 마무리하게 하여 조사과 내에서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게 됐다.
여기에다 필자 자신도 불평없이 즐기는 기분으로 열심히 하게 됐으니 더욱 시너지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조사과장으로 계신 분이 다름 아닌 오혁주 과장(작고)이었다. 이분은 나중에 대전지방국세청창을 지내시고 퇴직후 언론사에도 관여하셨던 국세청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분이셨다.
그때부터 그 분과 필자와는 독특한 만남이 시작돼 오랫동안 묘한(?) 인연으로 지속됐다. 그런 인연으로 서울 중부세무서에서 과장으로 모시기도 했고, 5공 초기 국가보위비상위원회(일명 국보위) 시절에는 함께 국보위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먼 훗날 필자도 명예퇴임한 후 세무사회장으로 있을 때 이분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신촌세브란스 병원 입원실까지 문병을 가기도 했는데, 이틀후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몹시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 분께서는 당시 동대문세무서 조사과장으로 계시면서도 예비군 소대장직을 맡고 계셨는데 워낙 군인정신이 투철해서인지 몰라도 세무서 자체 예비군 훈련시에도 직접 몽둥이를 들고 직원들을 마치 현역병 다루듯이 하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던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관 조사과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서도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호령이 났다. 반면 당신 마음에 들게 되면 물불 안가리고 뒤를 밀어주시는 정말 성격이 단순한 분이셨다.
필자보다 열살이나 많은 분으로 필자는 그때 막내동생 같은 마음으로 정말 사심 없이 열심을 다해 보필해 드렸다. 그분도 웬만한 일들은 모두 필자에게 지시하셨다. 그 덕분에 필자는 2년만에 사세서기보(지금의 9급)에서 사세서기(8급)으로 진급의 영광을 맛보게 됐다.

필자에게만 진급의 혜택이 있었다면 인사 특혜라는 시비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와 같은 임용동기(66년 개청요원)였던 다른 두사람도 함께 진급이 됐다. 또 그들은 나이도 나와 같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세청이 개청된지 얼마 되지 않아 가급적 말단 9급은 기본 승진소요 년수가 지나면 사기진작 차원에서 대부분 진급시켜 줬다.

어찌 됐던 최말단 9급에서 8급으로 진급되고 나니 모든 업무에 있어서 이제는 조수가 아니라 사수로서 독자적으로 업무를 담당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필자 자신도 굳은 책임감과 함께 차츰차츰 공직자 신분과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 때가 나이 22세때였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